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교익/비판과 논란/일본 유래설 (문단 편집) == 멸치육수 논란 == [[멸치]][[육수]]가 그동안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일제강점기 때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https://foodi2.blog.me/220691917561?Redirect=Log&from=postView|#]] 이전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멸치 육수 우리는 법은 황태처럼 말려서 쓰는 것이었고 지금은 일본식을 따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멸치 육수에는 대체로 말린 멸치를 쓴다. 냉장고도 없던 당시에 삶은 멸치를 어촌이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멸치는 보관상의 문제로 빨리 썩어서 이를 말리고 유통하는 방법이 개발되기까지는 멸치 육수 자체가 주류가 되기 어려웠고, 대략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 기술이 전래되어서 멸치 육수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다랑어(가쓰오) 육수가 확고한 주류로 자리잡고 있지 멸치 육수가 대세가 아니다. 주의할 부분은,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멸치국물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육수를 의미하는 것인지 국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 양측 다 쉽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말하기 어려우며, 다른 기록들에서 보더라도 조선시대에는 멸치를 먹는 방법은 말려서 먹는다거나 젓갈을 해먹는다거나 이외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서 멸치라는 생선을 이용한 다른 조리법이 존재했는지 단언할 수 없다. 즉, 공식적인 기록에는 없으나 존재하는 사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조선 시대에 멸치육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려면 자산어보에서 사용하는 "갱"이라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국만을 가리키는 것임을 입증해내야 하고, 더 나아가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멸치국물을 요리에 쓰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심지어 황교익은 (멸치) 어업도 일제강점기에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멸치를 잡아 가공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의 일로, 한국사에서는 대략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시대에 해당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조선 [[순조]] 대에 저술된 김려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047|우해이어보]]에는 멸치는 식용으로 쓸 수 없다는 내용이 있으나[* 여담으로, 이 책에는 멸치가 [[말라리아]]의 원인이라는 현대 기준으로는 틀린 정보가 들어 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의하면 멸치를 가지고 국(갱), 젓갈, 포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가 저술된 시기는 정약전이 1801년 유배를 당하여 1814년까지이고, 어디까지나 당시 널리 퍼진 사실을 "기록"하는 책이니만큼, 이미 그 전부터 멸치를 가지고 국을 만들거나, 젓갈을 담그거나, 말려서 포로 만드는 방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즉, 아무리 늦어도 순조 시절인 19세기 초에는 이미 멸치는 말린다는 가공법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또한 뒤이은 [[헌종(조선)|헌종]] 대에 저술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멸치는 날것은 먹을 수 없으나, 살아 있는 채로 탕제하고 말리면 반찬이 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정확히 현대의 멸치 가공법과 일치한다. 다만 이렇게 멸치잡이와 가공이 가능해진 이유 중 하나로 일본 어민들의 영향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멸치 어업이 아예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는 황교익의 주장과는 명백히 다른 학설이며, [[고구마]]가 조선 후기에 일본을 통해 전해졌고 현대에도 [[타코야키]]나 [[오코노미야키]] 등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요리인 것처럼 문화권 간 교류의 한 사례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규모의 멸치 어업이 있기는 했지만, 멸치라는 어종이 구체적으로 확립되고(이전에는 작은 물고기는 다 멸치라 부름) 대형 멸치 선단이 등장해서 삶아 말리는 형태의 니보시를 대량 가공하게 된 것은 일본 어민들의 이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다.[* 김수희 저, 근대의 멸치, 제국의 멸치 참고.] 일본은 이렇게 만든 마른 멸치를 대부분 비료로 사용했다. 해방 이후 일본과의 교역이 중단되어 일본으로 수출하던 어마어마한 양의 멸치가 내수용으로 전환되고, 해방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혼란기가 거듭되면서 멸치가 육수, 볶음 등의 식재료로 '재발견'된 것. 이렇듯 황교익은 일본의 영향만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인들에 의한 변용이나 재발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황교익의 '한국-일본의 음식사'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영향을 끼쳤고 한국을 이를 수용하기만 했다는 제국주의적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뚜렷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